오늘이랑
오늘이랑
- 심리건강에 도움이 되는 생각들을 나눕니다 -
은행잎자루가 도톰해졌습니다.
바람은 냉기가 없어지고 햇빛은 부드러워지고 땅속 까지 스며들고 있습니다.
며칠 더 지나야
여러날 나가서 걸어봐야
마음속 아직도 매서운 찬바람
움츠러 들었던 그늘 얼어버린 몸은 풀릴 것 같습니다.
제일 늦게요.
뇌는 외부 환경이 변하더라도 대상의 상태를 일관되게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합니다. 어제는 흐렸고 오늘은 맑더라도, 뇌는 '안정적인 환경'을 선호하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하나의 일시적인 '노이즈(소음)'로 처리하고 이전의 상태를 기준점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변화에 즉각 반응하기보다는 기존의 감각적 관성을 유지한다 하니 날씨 변화에 따른 심리적 적응에 시차가 발생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신이 이미 적응한 이전의 경험을 기준점으로 여기다 보니 변화를 받아들이기는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에 의하면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비교는 자신과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사람(친구, 친척, 직장동료) 사이에서 특히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전혀 모르는 재벌이 땅을 사는 건 내 삶과 무관하지만,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성공하면 나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집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땅이라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사촌이 논을 샀다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배가 아프다는 것은 심리학에서 마음의 고통이 육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 즉 신체화라고 합니다. 배가 아프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스트레스나 부정적 감정이 실제로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주어 근육을 수축시키거나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남의 성공에 배가 아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가치(정직, 성실함, 건강, 배려 등등)를 스스로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의 지혜로운 방법일 것 같습니다.
검은 패딩을 입고서 무표정하게 길바닥에 침을 휫 짧게 짧게 뱉어버리면서 갑니다.
그 친구는 아무말없이 같이 걷고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바닥에 닿을 정도가 아닌 짧은 길이.
단번에 내보내는 입술 동작이 대단합니다.
입 뿐만 아니라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가까이 하기 어려운 아우라입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동작이라 못할 것 같습니다.
못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할 수 있습니다. 안하고 있을 뿐입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한번 해봐야겠습니다. 아마도 할 수 있다면 그 청소년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테고 해보니 안되고 잘해보려는 의지와 상관없이 못하는 것으로 욕만 먹었을 겁니다.
욕만 먹고 끝났으니 남은 것은 침뱉기
아우라는 남아있을 터이니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해봅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결과 인정은 커녕 비난은 더 받았을 것이고
몸이 먼저 나가는 아우라는 자신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침이라도 뱉을 수 밖에
할 수 있는 일은 합니다.
맘에 들지 않는 세상 당신들도 나도.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도 모두다 합니다.
'시키는지 말라. 성에 안찬다.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돌려줄 것도 없습니다.
나도 그렇듯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사랑하는 사람곁으로 가겠습니다.
거칠게 뿜어내는 날 선 몸짓 뒤에는, 작고 숭고한 생명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때로는 가시 돋친 말과 행동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루가 되기도 합니다. 그 딱딱한 껍질 속에는 누구보다 따뜻한 인정을 갈구하는 여린 진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라고 부르는 모습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안간힘을 쓰는 사람의 절박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 듯 합니다.
화려했던 시절 만큼 단아한 기상이 있습니다.
시절 시절 맞는 차림새가 있지만
어느 날 마음에 드는 모양만 알아차립니다.
오늘은 어쩌다 민둥산이 들어왔습니다.
민 낯인가 싶지만 기품은 진중합니다.
청년 못지 않게 힘차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를 온전히 허용합니다. 화려한 옷(성과나 외양)을 다 벗어던진 '민낯'의 상태를 결핍이나 부끄러움으로 보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민둥산' 같은 시기가 있지만, 그 상태는 다른 변화의 바탕이며 삶의 소중한 일부임을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참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있을때도 편치 않습니다. 나아가 열심히 했으니 ‘뭔가 성과가 나겠지?’ ‘뭔가 결과가 좋겠지’... ‘이번에 성과가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우리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밀어붙이는 날카로운 채찍이 되어 있습니다. 성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날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듯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릴 때 우리는 우울하고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어떤 결과라는 목적지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성실함이나 배움, 공헌 같은 가치를 인식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을 칭찬해주면 어떨까요?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산다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
한 겨울 플라타너스 가지를 보셨나요?
가지에 달랑거리는 방울
떨어져 버린 나뭇잎 대신
바람을 맞고
눈소리를 거두며
가지와 한몸이 되어
분별 없으나
봄이 되면 터져 씨앗으로
어딘가에 새싹으로 자리 잡을 방울
조랑조랑 방울을 보셨나요.
잎이 떨어지고 가지와 몸통만 남은 나무의 자태가 아름답습니다. 잎을 다 떨구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겨울 플라타너스 가지 끝에 조랑조랑 매달린 작은 방울들이 그렇습니다. 소중했던 것들이 곁을 떠나고,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워진 시간은 결코 멈춰있는 시간이 아닌 듯 합니다.
2월 바람이 부는 오후 나절
북적이던 뚝섬가
강물이 시끄럽습니다.
아무도 없으니 더 요란합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강물이 시끄럽고 요란하니
사람들이 올 리가 없지요.
널따란 강변을 바람이 차지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좋고 나쁨 없이 알아차립니다. 강물이 시끄러운 이유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오지 않는 상황을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혼자 있음은 결핍이 아니라 관찰의 자리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 채워야 할 의미가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흐름이 있습니다. 널따란 강변을 바람이 차지하듯, 마음에도 잠시 생각이 아닌 감각이 머뭅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잘해야 된다. 맞습니다. 잘해야 됩니다. 무엇이든요.
이런 생각이 가끔은 신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신화는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화의 힘은 설득이 아니라 익숙함에 있습니다. 의심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듭니다. 기호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바르트는 잘해야한 된다는 생각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사회가 오랫동안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왜 잘해야 하는지 누가 그 기준을 정했는지 묻지 않게 만듭니다. 신화는 ‘맞잖아, 누구나 그렇게 인정하지’라는 말속에서 비교와 평가와 상식이 됩니다. 실패는 경험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처럼 느껴집니다. 잘해야만 된다는 생각이 하나의 신화일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잘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가치 있는 존재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강 가운데 얼음판
모서리와 크기가 다르다해도
너나 내나 같다.
쑥부쟁이 구절초 개미취 처럼
우리는 흔히 날카로운 모서리가 상대를 찌를까 봐, 혹은 서로의 모양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곤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누군가의 툭 튀어나온 '모난 모서리'는 누군가의 깊게 '움푹 팬 상처'를 가만히 채워주기에 가장 적합한 모양일지도 모릅니다. 서로의 깨진 틈은 서로를 밀어내는 벽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꼭 맞게 스며들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시린 겨울이라는 계절을 통과하며 단지 각기 다른 지점에서 부딪히고 깨졌을 뿐입니다. 나의 날카로움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며, 상대의 움푹함 또한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강물 위에서 서로를 지탱하고 연결하기 위해 빚어낸 연대의 모양일 수 있습니다.
해질 무렵 강은
사그라져가는 빛을 받아
살색으로
잠시 시린 기운을 벗어났습니다.
어제 눈 내린 강가 살얼음이
이국적인 모양새로
아래 흐르는 물결을 잊었습니다.
받아주고
얹여주는 강물이
고요하게 찰랑거립니다.
강물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의 빛을 '받아주고', 차가운 얼음을 제 몸 위에 '얹어줄' 뿐입니다. 거부하지 않고 빛이 쇠락해가도 그저 품어내는 그 넉넉함과 물결이 얼어붙어도 강물이 고요하게 찰랑거릴 수 있는 이유는 수용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고단했던 마음이 있다면, 저무는 빛을 받아 기꺼이 살색으로 변하던 겨울 강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린 기운을 벗겨내고 나를 안아주는 온기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받아주고 얹어주며 찰랑거리는 저 강물처럼, 우리 자신에게도 오늘 하루의 무게를 가만히 다독이며 내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너구리가 길을 걷다가 그만 발이 꼬여 이웃집 오소리의 예쁜 꽃밭을 밟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너구리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휴, 오늘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앞이 안 보였네. 게다가 아침부터 다리에 쥐가 났으니 어쩔 수 없지. 이건 그냥 운이 나빴던 실수야." 너구리는 자신이 여전히 꽃을 사랑하는 착한 너구리라고 믿으며 아무렇지 않게 길을 떠났습니다.
오후가 되자, 이번에는 오소리가 바쁘게 길을 가다 너구리의 집 앞 우편함을 툭 쳐서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창밖으로 지켜본 너구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저 오소리는 원래 남의 물건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무례한 녀석이야! 일부러 내 우편함을 넘어뜨린 게 분명해. 정말 못된 본질을 가졌군!"
살다보면 너구리 같은 생각을 합니다. 너구리 자신은 성실한 사람이지만 오늘만 예외적으로 '상황적 요인'에 의해 실수한 것이고, 오소리는 실수가 아니고 잘못했다고 합니다. 오소리의 행동은 '성격(본질)'이 문제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사자는 숲속에서 가장 힘이 셌습니다.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자의 걸음걸이는 늘 느긋했습니다. 어느 날, 숲 속 동물들이 모여 잔치를 열었을 때 사자는 분위기가 가라앉자 가벼운 농담을 던져 모두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동물들은 감탄하며 속삭였습니다. "역시 왕이야! 분위기를 읽는 센스가 보통이 아니군."
같은 잔칫상에서 토끼는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토끼의 귀는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눈동자는 좌우로 빠르게 굴러갔습니다. 사자가 입을 열 때마다 토끼는 사자의 기분이 좋은지, 배가 고픈 건 아닌지 살폈습니다. 다른 동물이 토끼에게 물었습니다. "토끼야, 왜 그렇게 가만히 있니?" 토끼가 대답했습니다. "사자님의 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곧 사냥하러 가실 것 같아. 지금은 조용히 하는 게 상책이야." 그러자 주변 동물들은 토끼를 보고 "참 눈치가 빠르네."라고 말했습니다.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타인의 비난이나 부정적 평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이 여유는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적재적소에 필요한 행동을 하는 센스로 발휘됩니다. 반면에 낮은 사람은 타인의 표정이나 비언어적 선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있고 이것이 눈치로 발현됩니다. 어쩌면 개별 주체의 성격이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상태(환경)와 관계의 역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은 차이점만 보이고, 멀리 있는 사람은 공통점만 보인다'
두 친구가 평소 감탄을 자아내는 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멀리서 볼 때 산은 한 색깔이었는데 막상 산에 도착하니 여러 빛깔의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막상 산에 들어서자 한 친구는 주변을 보느라 걸음이 느려졌고, 한 친구는 산 정상을 향해 빠르게 걸었습니다. 멀리 산을 볼 때와 실제 산 모습은 달랐습니다. 또 서로 마음이 꼭 같다고 생각한 친구도 막상 산속에 들어오니 서로의 다른 점들이 가치처럼 콕콕 찔렀습니다.
대상과 거리가 멀면 우리는 세부적인 특징보다는 전체적인 윤곽과 본질에 집중합니다. '사람은 비슷하다'거나 결국 '다 같은 마음이다'라는 식으로 공통점을 먼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까워질 수록 우리는 상대를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게 됩니다. 이 때는 본질적인 공통점보다 사소한 습관이나 말투, 가치관의 미세한 결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라는 전제를 하게 되는데, 그 기대가 어긋나는 날 때 차이는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반면 타인은 기대를 하지 않기에 작은 공통점만 발견해도 반가움을 느낍니다. 가까운 관계는 99가지가 같아도 한 가지가 다르면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청개구리는 부모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반대로만 하였습니다. 청개구리 어머니는 죽을 때가 되어 평생 반대로만 하는 자식을 생각하며 죽은 뒤에도 반대로 할 것으로 예상하고, 산에 묻히려고 자식에게 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늦게 나마 불효를 뉘우친 청개구리는 유언대로 냇가에 묻었습니다. 그 뒤 비가 오기만 하면 무덤이 떠내려갈 것이 걱정되어 슬프게 울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가 제한받는다고 느낄 때 그 자유를 회복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진다고 합니다. 부모가 강압적으로 명령하거나 지시할 때, 자녀는 자신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대 행동을 선택합니다. 즉, 청개구리의 행동은 나쁜 성격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주체성'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리적 발버둥일 수 있습니다.
반면 어머니 청개구리는 아들이 자신의 말을 반대로 할 것을 예상하고, 본심(산에 묻히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냇가에 묻어다오'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상반된 두 가지 메시지가 동시에 전달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마음의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거두였던 파울리에게는 한 가지 징크스가 있었습니다.
그가 실험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멀쩡하던 실험 장비가 고장 나거나, 유리관이 깨지고, 정밀 기계가 멈춰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동료 물리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우연이나 농담으로 여겼지만, 심리학자 융과 파울리 자신은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파울리는 지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지만, 내면적으로는 심각한 정서적 불안과 억압된 감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융은 이 현상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의식에서 소화되지 못한 강렬한 심리적 에너지(무의식)가, 갈 곳을 잃고 외부의 물질세계로 튀어 나간 것이다.' 즉, 파울리 내면의 '살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는 억눌린 생존의 욕구가 마음 안에서 해소되지 못하자, 밖으로 뚫고 나와 기계를 부수고 현실을 뒤흔든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은 별개가 아닙니다. 내면의 태풍은 반드시 바깥세상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아주 특별한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정원은 이 넓은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원사는 정원 입구에 서서 울타리 안을 바라봅니다. 그 안에는 높이 솟은 나무도 있고,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따스한 햇살이 비추기도 하고,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원사는 그 모든 날씨와 풍경이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압니다. 꽃이 만발한 화단 뿐만 아니라,깊고 어두운 동굴, 잡초, 미완성으로 남겨진 조각상까지도 모두 이 정원의 일부입니다.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을 혐오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대신 친절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정원 구석구석을 산책합니다. 자신이 정원을 사랑으로 대할 때, 풀숲에 가려져 있던 보물 같은 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원을 둘러보다 보면 어떤 나뭇가지는 썩어 있고, 어떤 꽃은 시들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정원사는 당황하지 않고 가위를 듭니다. 시든 가지는 과감히 잘라내 버리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씨앗을 심습니다.
정원사는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며 이 땅을 일굽니다. 폭풍우가 쳐도, 잡초가 자라나도 괜찮습니다. 가위를 든 손도, 씨앗을 뿌리는 마음도 모두 정원사의 것이니까요.
정원 한가운데 서서 조용히,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정원의 주인은 나다. 나는 내 정원을 다스릴 수 있다. 참 괜찮은 정원이다.'
추운 어느 날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피하려고 떼지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가까이 붙을수록 서로 뾰족한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웠습니다. 찔린 고슴도치들은 멀리 떨어졌습니다. 멀리 떨어질수록 견디기 힘든 추위가 엄습했습니다. 고슴도치들은 붙었다, 떨어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너무 아프게 찔리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연인관계나 부모-자녀관계 또는 어떤 친밀한 관계이든 상호작용이 정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역동적인 평형상태에 가깝습니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계 안에서 서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과잉 친밀하거나 정서적 단절은 너무 아프거나 너무 추운 상태에 있게 합니다. 적당한 거리는 건강한 자기분화의 모습입니다. 자기분화는 정신 내적으로 사고와 감정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대인관계적으로는 자신과 타인 사이의 분화를 의미합니다.
숲 속에 항상 늑대가 나타날까봐 불안에 떠는 엄마 토끼가 살았습니다.
엄마 토끼는 자신의 이러한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 토끼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기 토끼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엄마 토끼는 아주 큰일처럼 보였습니다. 엄마 토끼는 아기 토끼가 밖으로 나갈 때마다 "밖에 나가면 위험하니, 엄마 옆에 붙어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아기 토끼 다리는 튼튼했지만 엄마 토끼는 자신의 두려움을 아기 토끼가 약하다고 착각하고 믿었습니다. 아기 토끼는 매일 나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매일 걱정스러운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리가 약하고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아기 토끼는 뛰는 연습을 멈추고 늘 엄마 뒤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기 토끼는 어른 토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근육을 쓰지 않아서 정말로 다리가 가늘고 약한 토끼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불안이 아이의 실제 모습을 바꿔버릴 수 있습니다.